6. 시트로엥

자동차 회사 2014.08.11 19:33 Posted by 자동차 전문 교육 자동차 역사가

6. 시트로엥

1. 시트로엥 개요

 - 설립자 : 앙드레 구스타브 시트로엥(Andre Gustave Citroen•1878~1935년)

 - 설립년 : 1915

 - 최초 생산품 : 대포

2. 시트로엥 역사

 - 1919년 

Type A 최초로 출시하여 1개월여만에 3만대나 주문 받았다.

 - 1922년

신모델 B2를 직접 몰고 세계 최초로 사하라 사막에 도전한 일을 꼽을 수 있다. 

-1924년 

시트로엥이 B2 탐험대를 조직해 아프리카를 횡단하는 기록을 세웠다. 

-1925년

강철로 제작된 B12의 지붕에 코끼리를 얹고 시내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또 전구 25만여개 90㎞ 길이의 전선을 이용해 ‘CITROEN'이라고 쓴 네온사인을 높이 300m 가량의 에펠탑에 10여년간 걸어 브랜드를 알리기도 했다.

-1930년

 차량 판매량이 르노가 6만대, 푸조 5만대였던 반면 시트로엥은 8만대를 상회했다.

-1934년

 최초의 ‘양산형 전륜구동차’인 트락시옹 아방(Traction Avant) 출시하였다. 최초의 모노코크(Monocoque - 별도의 프레임을 쓰지 않은 일체구조로 무게는 가볍고 높은 강성을 확보할 수 있다.)식 차체가 적용되어 전고도 낮으면서 전륜구동 방식으로 인해 넓은 실내 공간이 확보됐다. 또한 독자적인 기술력인 토션 바(Torsion Bar) 방식의 독립식 서스펜션을 개발해 승차감도 향상시켰다. 세계 최초 전륜 구동 차로 유압식 브레이크가 장착하였다. 그러나 과도한 투자로 시트로엥은 타이어 회사 미쉐린 (Michelin)으로 넘어갔다.

-1948년

파리 모터쇼에서 선보인 2CV는 세계 최초로 4단 변속기를 표준으로 장착하였다.

-1955년

DS19는 출시하여 자동 높이 조절이 가능한 하이드로뉴메틱 서스펜션과 세계 최초로 전륜에 디스크 브레이크가 장착하였다.

 - 1934년~1957년

시트로엥 트락시옹 아방 76만대가 생산됐다.


3. 생산 모델

트락시옹 아방(Traction Avant), Hvan, 2CV, DS, GS, 와 SM 그리고 최근 모델인 DS3와 DS4가 있다.

5. 르노(Renault) 자동차 역사

자동차 회사 2014.08.09 23:33 Posted by 자동차 전문 교육 자동차 역사가

5. 르노(Renault) 자동차 역사

 1. 르노 자동차 개요

- 설립 년도 : 1899

- 설립자 : 르노 형제(루이 르노, 마르셀 르노, 페르낭 르노)

- 국적 : 프랑스

- 업종 : 자동차 및 군용 장비

2. 르노 자동차 역사

 - 1898년 르노가 생산한 최초의 자동차는 타입 A로 직접변속기를 적용했다

 - 1900년에는 세계 최초의 살롱인 타입 B를 생산한다.

 - 1905년 AG1이 택시가 성공

 - 1914~1918

 1차 세계 대전 탱크(FT-17) 및 항공기 엔진과 포탄과 버스/트럭 군수품 생산했다.

1918년 농기계 사업에 진출한다.

 - 1939~1944

독일을 위한 군용 장비 생산하였다. 1942년 연합군의 공급으로 르노의 대부분(80%) 시설이 연합군에 의해 파괴 됨

 - 1944년

전후에 르노 설립자 루이 르노가 감옥에 수감 된 후 한달 만에 사망하였고, 남아있는 르노의자산을 프랑스 정부가 몰수하여 1945년 국영자동차회사(Régie Nationale des Usines Renault)가 되었다.

- 1947년

포르쉐의 설립자인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개발에 참여한 소형차 ‘4CV’를 개발하였다.

- 1950년

 1950년 작은 규모의 중대형 상용차 업체인 소무아(Somua)와 라틸(Latil)을 흡수하였다.

 4CV는 프랑스의 국민차로 떠올랐다.

 -1955년

 1955년 트럭•버스 제조사 ‘사비엠(Saviem)’과 합병했다. 1978년 이 회사는 시트로엥의 자회사와 합병해 상용차의 생산과 판매를 담당하는 ‘르노 비클스 인더스트리얼스(RVI)’로 거듭났다.

 - 1961년에 ‘르노 4’가 출시 되었다. 이 차는 값싸고 실용적이고 튼튼하여 시장에서 성공하였다.

- 1966년 

르노 4 출시 5년 만인 1966년 누적 생산 100만 대를 판매하였다. 1994년 단종될 때까지 33년간 총 813만5424대가 팔렸다. 1970년대 르노를 유럽 최대 자동차 회사 되었다.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푸조•볼보와 기술적인 업무 제휴를 맺고 공동 엔진을 제작했고 각 사의 차량에 탑재해 출시했다.

-1979년

 미국의 ‘AMC’와 ‘맥트럭’의 지분을 각각 몇 22.5%, 20%씩 사들이면서 북미 지역 판매 거점 확보했다. 얼마 후 르노는 AMC가 파산 위기를 겪자 투자금을 보호하기 위해 대규모 자금 지원을 통해 이 회사 지분을 47.5%까지 늘였다.

- 1984년

맥트럭도 44.6%까지 지분을 추가로 확보했다., 1984년 이후 3년 연속 적자 발생하였다.

- 1986년

 엘리트 행정가 루이 슈바이처(Louis Schweitzer)가 르노그룹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 1987년

AMC를 크라이슬러에 매각(크라이슬러는 인수 후 ‘JEEP’로 사명 변경)했고 인력 감축과 불필요한 사업 철수 등 구조조정에 나섰다. 

- 1991년 

프랑스 정부는 120억 프랑의 보조금을 해서 1991년 9월 회사를 민영화하기로 결정했다.

- 1993년

민영화를 통해 1983년 10만 명이 넘었던 르노의 종업원은 1993년 6만6600명까지 축소되었다.

- 1995

1995년 8월 브라질에 진출하였다. 

  -1996년

  1993년 79%에 달했던 프랑스 정부의 르노 지분율은 1996년 46%까지 낮아졌다. 1996년 6월 제너럴모터스(GM) 유럽법인과 소형 상용차 분야에서 제휴했다. 포르투갈 공장은 1996년 6월 생산을 중단했다. 카를로스 곤이 르노 자동차 부사장에 취임하였다.

 - 2000년

  ‘닛산 회생계획’(Nissan Revival Plan)을 발표하였다.르노가 한국 삼성 자동차 인수하였다.

  -2005년

 카를로스 곤이 루이 슈웨체르 회장의 뒤를 이어 르노•닛산그룹을 총괄하는 회장에 올랐다.

  - 2010년

  닛산 전기 자동차 리프(LEAF) 미국과 일본에서 출시함.

  - 2014년

  전기차 리프(LEAF) 누적 판매량 10만대 돌파로 전기차로는 최대 판매 기록



4. 도요타 자동차(Toyota Motor)

자동차 회사 2014.08.07 11:29 Posted by 자동차 전문 교육 자동차 역사가

4. 도요타 자동차(Toyota Motor)

1. 개 요

토요타 자동차 주식회사(일본어: トヨタ自動車株式会社 トヨタじどうしゃかぶしきかいしゃ 도요타 지도샤 가부시키카이샤[*], 영어: Toyota Motor Corporation), 줄여서 토요타 또는 도요타는 일본 아이치 현 도요타 시에 본사가 있다. 

2. 도요타 자동차 약사

 - 1933년

   9월 도요다 사키치(1867년 ~ 1930년)가 창업한 '도요타 자동 방직기 제작소'에 자동차 부서가 설립되었다. 부서 설립의 중심이 된 것은 사키치의 아들 도요타 기치로(1894~1952)이지만, 초대 사장은 사키치의 사위인 도요다 라지부로였다.

 - 1935년

   방직기 제작 기술인 주조/기계 가공 등의 노하우로 자동차 제조를 개시하였다.

 - 1936~1945년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육군용 트럭을 생산

 - 1946~1950년

   1947년에 승용차 SA 실패하여 경영위기에 빠졌고, 생산 인원 감축 반대와 도요다 기치로 해임을 요구하는 도요타 자동차 노동조합의 총 파업 발생하였다. 도요다 기치로가 사장에서 해임되고 제국은행의 투자 지원으로 도요타 자동차 판매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한국 전쟁의 발발로 미군용 트럭의 대량 주문으로 기사회생하였다.

 - 1951~60년

1951년에 크라운, 1957년 코로나, 1961년 퍼블리카를 출시하였다. 이 때 코로나가 인기를 끌었다. 1958년에 크라운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나 품질 문제로 실패하였다.

 - 1961~70년 

코로나는 최초에 1.0ℓ 엔진을 얹었으나 64년 1.5ℓ 엔진을 얹은 패밀리카로 닛산 블루버드(Bluebird)와 경쟁을 하게 된다. 1964년에 일본 자동차 생산은 58만대에 이르렀다. 이 때 도요타 코롤라와 닛산의 블루버드가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된다. 1968년 코롤라(Corolla)가 미국 시장에 진출 크게 히트하게 된다.

 - 1971~1980년

 70년대에 셀리카가 나왔고, 셀리카의 형제 모델인 카리나로 코롤라와 코로나의 틈새를 메웠다. 1973년에 발생한 오일쇼크로 영향으로 도요다는 75년 미국시장에 27만 8천대를 판매하여 폴크스바겐을 앞지르고 미국내 수입차 판매 1위에 올랐는데, 그 중 반 이상이 코롤라(Corolla)였다. 1979년에 2차 오일쇼크로 미국 시장에 일본차에 대한 규제 시작되었다.

 - 1981~1990년

코롤라는 83년 초 생산 1천만 대를 돌파하였다. 코롤라(Corolla)와 타코마 등을 생산하는 GM과의 합작공장(NUMI)도 84년부터 캘리포니아에서 생산하였다. 1988년에 미국에 고급차 브랜드인 렉셔스를 출시하였다. 생산개발의 도요타 자동차 공업과 협력 관계에서 1982년 합병하여 현재의 도요타 자동차 주식회사가 된다.

 - 1991~2000년

 렉서스는 1990년 4만2806대가 판매됐고 매년 2만~3만 대 이상 판매되며 미국 고급차 시장점유율 10%를 넘어섰다. 1999년 고급차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차지하며 2011년 BMW에 자리를 내줄 때까지 내리 11년 연속 1위 자리를 지켰다. 내수 침체와 엔고의 영향으로 토요다는 계열관계인 경자동차업체 다이하쓰 공업과 트럭업체 히노 자동차공업에 대한 출자비율을 50% 이상 늘려 자회사화하여 경차부터 대형트럭까지 모두 갖춘 종합 자동차 그룹으로 재편 하였다. 1997년 환경차인 대명사가 된 프리우스(Prius)를 출시하였다.

- 2001~2014년

2003년 세계의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 브랜드 사이언(Scion)을 런칭하였다. 2009년 미국에서의 도요타 렉셔스의 급발진 사건으로 2010년에 대규모 리콜을 실시하였다.


3. 폭스바겐(VW)의 역사, 강력한 독일 경제의 상징

자동차 회사 2014.08.05 11:35 Posted by 자동차 전문 교육 자동차 역사가

3. 폭스바겐(VW)의 역사, 강력한 독일 경제의 상

 1) 폭스바겐의 개요

- 창립 1937년

- 창립자 : 페르디난트 포르셰 (Ferdinand Porsche)

- 국가 : 독일

- 본사 : 니더작센 주 볼프스부르크

- 모기업 : 폭스바겐 AG

2) 폭스바겐 년도별 약사

 - 1933년 

   1차 세계 대전 이후, 히틀러가 국민차 프로젝트로 포르쉐 박사에게 1000 마르크 미만의 국민차(Volks + Wagen)를 만들 것을 명한다. 히틀러의 요구 조건은 성인 2명과 어린이 3명을 태우고 100km/h로 달릴 수 있는 자동차였다. 그 "국민 자동차"는 제3제국 국민들에게 990DM(그 당시 작은 모터사이클 가격에 해당함)에 제공될 예정이었다.(참고로 당시 평균 주급은 32DM).

 - 1937년 

  : 회사 설립

 - 1939년

   2차 세계 대전 발발로 국민차 프로젝트가 중단되고, 1938년 4월 20일 히틀러의 49세 생일에 한 대의 타입-1 카브리올레가 히틀러에게 기증된 것 외에 저축 프로그램을 마친 그 누구에게도 차는 지급되지 못했다.

 - 1940~1944

 포르쉐 박사는 폭스바겐사를 군용 목적으로 이용하라는 임무를 맡게 되어 ‘쿠벨바겐(Kubelwagen)’이라는 군인용 짚차가 탄생하게 된다.

변형된 모델로는, 수륙 양용인 ‘Schwimmwagen’이 있었는데 ‘쿠벨바겐’과 같은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군용차였다. 아직 미완성인 폭스바겐 공장에서 총 50,788대의 ‘쿠벨바겐’과 14,276대의 ‘Schwimmwagen’이 생산되었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까지 비틀은 고작 630대만이 생산되었다.

 - 1946~

1946년에 10월 14일, 전쟁이 끝난 이후 10,000번째 국민차가 생산되었다. 세단 가격은 5000 라이히스마르크로 정해졌는데, 그래도 여전히 일반인들이 살 수는 없었다. 1947년에 공장 운영팀은 국민차를 수출하기 위해 하노버(Hannover) 수출 전시에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는데 세계적으로 성공적인 자동차가 탄생하려는 순간이기도 했다. 폭스바겐의 첫번째 수입자이자 딜러는 네덜란드의 폰(Pon) 형제였는데 1947년에 폭스바겐과 계약을 체결했다. 폭스바겐 공장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였다. 공장의 생산량에 많은 부분이 CCG에 공급되었다. 1948년에 Heinrich Nordhoff는 폭스바겐 공장의 경영 감독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는 그의 의무와 선경지명, 그리고 열정으로 업무에 임했다. 그의 기본철학은 근로자들과 꾸준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또한 근로자들을 같은 목적을 위해 노력하는 파트너로 여겼다. 이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폭스바겐에서 지켜지고 있다. 이로써 Nordhoff와 폭스바겐 전 근로자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생산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5월에는 25,000번째 국민차가 만들어졌으며, 회사 사무실이 베를린에서 볼프스부르크로 옮겨진다. 이것은 오늘날의 폭스바겐으로 변천하는 또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2월 28일에는 폭스바겐의 보험 서비스(VVD – Volkwagen-Versicherungsdienst)가 개설되었다 비틀은 덴마크, 룩셈부르크, 스웨덴, 벨기에 및 스위스에서도 판매되기 시작한다. 총 생산량의 23%가 수출되었으며 외국통화로 2천백만마르크의 수익을 올렸다. 이 해에 모두 19,244대의 비틀이 생산되었다. 폭스바겐의 시장점유율은 63.5%가 되었고 독일 내의 모든 차중 64.4%가 폭스바겐이 되었다. 1949년에 공장 관리권은 연방정부로 넘어가고, 이들은 나중에 로우어 색소니(Lower Saxony)의 연방 주에 관리권을 행사하도록 위임하게 된다. 5월 13일, 볼프스부르크의 생산라인에서 50,000번째 국민차가 나왔고, 계속되는 증가 추세로 폭스바겐 금융사(Volkswagen Finanzierungsgesellschaft) 가 설립되었다. 4개 좌석의 VW 캐브리오레(VW Cabriolet)는 오스나브룩(Osanabruck)에 있는 카르만 사(Carmann Company)에서 차체를 만들어 생산되었다. 이 차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오래 생산된 컨버터블이 되었다. 오스나브룩 라인에서 1980년 1월 10일에 마지막으로 생산된 캐브리오레가 330,281번째 비틀 컨버터블이었다. 폭스바겐 공장의 연간 생산은 46,154대로 증가했고 9,497명의 근로자를 보유하게 되었다. 수출용 비틀은 새로운 색상과 도금, 그리고 더욱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선보여졌다. 그래서 비틀은 원래 있었던 군청색과 펄 그레이 외에 파스텔 그린, 미드브라운, 보르도레드, 그리고 검정색으로도 생산되기 시작한다. 독일에서 폭스바겐의 시장점유율은 49,3%, 독일차의 50%가 폭스바겐차가 되었으며 7개국에 수출되었다.

- 1950년

3월 4일, 공장은 100,000번째 국민차의 탄생을 축하했다. 엔진은 상당히 증진되었으며 수출용 모델은 수압(hydraulic) 브레이크가 장착되었다. 이제 폭스바겐은 세가지 모델 – 탑이 없는 컨버터블, 선루프가 장착된 탑, 혹은 완벽하게 닫힌 탑으로 선보여졌다. 보통 폭스바겐의 가격은 4,800마르크이었고 수출모델은 5,450마르크에 팔렸다. 

- 1951년

연간 생산량은 트럭 12,003대를 포함하여 105,712대에 달했다. 폭스바겐은 이제 29개국에 수출되는 세계적인 자동차가 되었다. 독일 연방 공화국에서는 729개의 지점에서 11,000명을 고용하게 되었다.

-1952년 

1952년의 주요 기술 혁신은 수출용 차량들과 캐브리오레에 들어 있는 싱크로메시 변속기(synchromesh gearbox)였다. 이 기술로 이중으로 클러치를 뺄 필요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기어를 보다 더 유연하고 조용하게 바꿀 수 있게 되었다. 

-1953년 

생산량은 꾸준히 증가해 독일차 중 42.5%가 폭스바겐이었으며 경상용차는 40.9%가 폭스바겐에서 생산한 차였다. 86개국으로 수출국도 늘어났으며 외국 통화로 2억5천4백2십만마르크의 수익을 창출했다. 7월 3일에는 500,000번째 자동차가 생산되었다. 

-1954년

VW 엔진의 출력이 30bhp로 향상되었다.

-1955년

 백 만대의 생산량을 달성하게 되었다.

- 1957년

 폭스바겐의 직원수는 거의 31,000명에 달하였다. 멜버른(Melbourne)에서는 폭스바겐이 51% 소유권을 갖고 폭스바겐 호주를 세웠다. 

- 1959년

 하노버에서도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공랭식 및 최신 기술인 수냉식 폭스바겐 박서 엔진(air-cooled and water-cooled VW boxer engine)이 계속 이 곳에서 생산된다. 

- 1961년

 새로운 VW 1500에서는 9월부터 살롱(saloon)과 카르만 기아 쿠페로 생산에 들어갔다.

- 1965년

 VW 1600 TL이 첫 선을 보인 시기도 이 때였다. 2차 대전 이래 10억번째 폭스바겐이 탄생했다. 자회사였던 오토 유니온(Auto Union)에서 아우디(Audi)라는 새로운 모델을 개발했다.

-1967년

 안전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었다. 모든 자동차가 새로운 safety steering column와 이중 브레이크(dual-circuit breaks)를 장착하였다. 최초로 비틀에 세미 오토매틱 변속기가 옵션으로 설치되었으며 VW1600에는 전자동 변속장치가 장착되었다. 

 -1968년

 Heinz Nordhoff 박사가 4월12일 향년 69세로 별세하였다. 1968년의 새로운 디자인은 VW411로 68bhp 엔진을 장착한 2도어/4도어 중형 세단이었다.

 -1969년

 잘츠기터(Salzgitter)공장 건설을 위한 대지를 구입하였다. 1970년부터 전면 휠드라이브와 수냉각 기능을 갖춘 NSU-developed K70이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1975년 이 모델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잘츠기터 공장은 211,127대를 생산하였다. 전지 급유 시스템이 VW411의 최대 출력을 80bhp까지 끌어올렸다. 1970년 모델로 다목적 VW181이 출시되었다. 이 모델은 대다수 연방군대의 수송차량으로 사용되었다. 8월 21일 Auto Union GmbH와 NSU Motorenwerke AG가 합병하여 아우디 NSU 오토 유니언 주식회사(Audi NSU Auto Union AG)가 설립되었다. 폭스바겐은 이듬해까지 이 회사의 지분을 99%로 끌어올렸다.

- 1972년

 2월 17일 15,007,034번째 비틀이 생산되어 1908년부터 1927년 사이에 생산되었던 전설의 포드 T모델을 누르고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자동차로 기록되었다.

- 1973년

 폭스바겐 파사트가 출시되었다. 이는 차세대 최초의 신모델이었다. 파사트는 자동차가 보여줄 수 있는 기술적 혁신을 담았으며 개인들의 요구에 맞게 제작되었다. 파사트는 전륜 구동에 4기통 직렬 엔진과 단일 강철 몸체 등의 기능을 뽐냈다. 대형 후미개폐문(tailgate)이 있는 4도어형 파사트 배리언트(Passat Variant)가 가을에 출시되었다. 이 모델은 70년대초 폭스바겐이 보여준 혁신의 하나인 플라스틱 연료 탱크를 세계 최초로 장착하였다. 

- 1974년

볼프스부르크에서 비틀 생산은 11,916,519번째를 기하여 마감하였다. GOLF 출시함.

 -1985년

폭스바겐은 Volkswagenwerk AG에서 폭스바겐 주식회사(Volkswagen AG)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프랑크푸르트 모토쇼에서는 3가지 앞선 기술 혁신이 소개되었다. 

폴로 쿠페 G40의 G-charger, 출력을 향상시키는 최적화된 슈퍼 충전기(supercharger)

동력과 가속을 일으키고 콤팩트 라인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낸 16밸브 골프 엔진 

배기 가스 수준을 낮춘 최신 장치

9월1일 중국 파트너와 합작으로 상하이 폭스바겐 자동차 회사(Shanghai Volkswagen Automotive Company Ltd.)를 설립하였으며 이곳에서 VW 산타나를 생산을 시작하였다.

 -1986년

스페인의 세아트 인수하였다. 1,640,583대의 폭스바겐과 아우디를 유럽에 판매하며 유럽 최대의 자동차 생산업체가 되었다.

 - 1990년 

체코의 자동차회사인 스코다(Škoda)를 인수하였다.

 - 1991년

3월에 VR6엔진이 등장하면서 VW차종에 처음으로 6기통 엔진이 등장하게 되었고, 파사트에 장착되였다. 

  

3) 폭스바겐의 브랜드 전략

폭스바겐의 브랜드 전략은 거의 교과서에 가깝다. 폭스바겐은 비틀의 성공에 힘입어 1964년에는 아우디를 인수하고 1980년대에는 골프, 제타 모델이 잇따라 히트를 했고 동시에 세아트, 스코다 등의 유럽 자동차회사를 인수하게 되면서 유럽 최고의 자동차회사로 거듭나게 된다. 199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스포츠카인 람보르기니, 3대 명차로 꼽히는 벤틀리 등을 인수하여 고급 자동차 시장의 포트폴리오를 가지게 되었으며 2010년에는 폭스바겐 탄생의 1등 공신이었던 포르쉐 자동차 회사까지 합병하여 세계 자동차 기업에 합류한다. 폭스바겐의 성공요인은 그룹 내 다양한 브랜드들이 보유하여 다양한 고객의 요구에 부응하여 경영 위기를 최소화 하였다. . 이는 이후 2010년 세계 자동차 시장의 위기에도 오히려 주문이 너무 많아서 3교대로 일을 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폭스바겐 그룹의 멀티브랜드 전략은 브랜드별 상호 보완으로 고객 만족 및 경영 안정을 추구하였다.

한편으로는 브랜드별 분리된 세일즈ㆍ마케팅 전략은 각 브랜드만의 특색을 강화시켜주는 한편으로 공동으로 기술을 개발하여 공유하거나, 생산설비와 원자재 등을 그룹 차원에서 시행해 비용을 아끼고 효과는 극대화한다. 이는 기업 차원에서 시장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고 꾸준하게 연구개발과 투자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해주어 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린다. 폭스바겐 그룹은 매년 매출의 5% 이상은 반드시 기술연구개발에 투자하는 ‘5% 룰’을 철저하게 준수하는데 이는 1980년부터 꾸준히 이어져왔다. 폭스바겐 보유 브랜드는 현재 폭스바겐 그룹(Volkswagen AG)은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세아트, 스코다, 아우디 등이 있다.


*참고 자료 1. 한국 폭스바겐 홈페이지

           2. 네이버 



2. 포드 자동차 역사(FORD MOTOR Company)

자동차 회사 2014.08.05 08:31 Posted by 자동차 전문 교육 자동차 역사가

2. 포드 자동차 역사(FORD MOTOR Company)

 1) 포드 자동차 개요

  포드 자동차 회사(Ford Motor Company)는 미국의 자동차를 제조, 판매하는 다국적 기업이다. 포드는 1903년 6월 16일 미국 미시간 주 디어본(Dearborn)에서 헨리 포드(Henry Ford)가 설립했고 디어본에는 현재까지 포드 본사가 있다. 포드 자동차는 모델 T라는 전후 무후한 모델을 개발하여, 미국과 전 세계에 자동차의 보급을 대중화 시켰다. 특히 컨베이어 대량 생산 방식을 채용하여 원가를 획기적으로 낮추어 대중적인 자동차를 보급시켰다.

 2) 포드 자동차 약사

1903년 - 포드 자동차 설립.

1903년 - 포드 자동차 최초의 모델인 A를 미국에서 판매하고 영국으로 수출함

1908년 - 포드 모델 T 발표

1913년 - 최초의 대량 생산 시스템 개발

1922년 – 링컨(Lincoln) 인수

1936년 - 포드 재단 설립

1938년 - 머큐리 브랜드 설립

1947년 - 헨리 포드(Henry Ford) 사망

1954년 - 선더버드 발표

1964년 – 머스탱(Mustang) 발표

1970년 - 리 아이아코카 (Lee Iacocca) 회장 취임

1979년 - 마쓰다 지분 25% 인수

1980년 - 에스코트(Escort) 발표

1986년 - 대한민국 기아산업의 지분 10% 인수

1989년 – 머큐리 브랜드 폐기

1990년 – 재규어(Jaguar) 인수

1991년 - SUV인 익스플로러 (Explorer) 발표

2000년 - BMW에서 랜드로버 (Land Rover) 인수

2003년 - 포드 자동차 회사 설립 100주년


2) Ford 자동차 역사

 - 1910~1920년대, 포드 자동차의 성공

 포드 자동차는 1903년에 설립되어, 1903년에 모델 A를 출시하고 영국에 수출하였다. 그리고 1908년에 전설 모델 T를 출시하여 자동차 대량 생산, 자동차 대중화의 시대를 열었다. 1913년 대량 생산 방식인 컨베이어 라인을 본격적으로 도입하였다. 이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1914년 당시 일반적인 노동시간은 하루 9시간이었고 임금은 일당 2달러 34센트를 8시간 노동시간에 5달러를 지급하면서 노동자의 구매력을 대폭 향상 시켜 대량 소비를 시대를 열었다. 

 자동차 생산방식의 혁신으로 엘리 휘트니가 제안했던 교환 가능한 부품을 사용한 최초의 일괄 작업 공정을 1913년 도입하였다. 이 방식에 따라 자동차는 벨트를 따라 이동하게 되고 작업자는 단순한 반복 작업으로 부품을 장착하게 되어, 기업 입장에서는 저비용으로도 높은 품질 관리가 가능하게 되었다. 포드 모델 T는 1914년 50만대 이상 팔리면서 포드 자동차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 1921~1930년대, 포드 자동차의 추락

포드 자동차는 1922년에 링컨(Lincoln)브랜드를 출시하여 고급 차종 브랜드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이때 포드 자동차는 1908년의 모델 T의 성공에 심취한 나머지, 소비자들은 좀 다양하고 고급스러운 모델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무시하여 GM에게 1위의 자리를 내 준다. 또한 GM의 전문적인 모델 디자인 개발 과정과 혁신적인 개발 과정을 적용시키지 못해서 경영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 때 GM은 소비자가 원하는 모든 차종을 각각의 가격에 맞는 브랜드를 제공하여 미국 시장을 지배하게 된다.

- 1931~1940년대, 포드 자동차의 반격

 이런 GM의 전략에 맞춰서 포드 자동차는 떨어진 시장 점유율을 회복하고자, 중저가 브랜드인 머큐리(Mercury)를 1938년에 출시한다.

-1941~1950년대

 헨리 포드의 손자인 헨리 포드 2세(Henry Ford II)는 1945년부터 1960년까지 포드 자동차 회사의 사장으로 재임한다. 이 때 헨리 포드2세는 GM과 비교하여 뒤떨어진 경영방식과 개발과정을 혁신하고자, 1946년 포드 자동차 회사에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가 재무기획 관리자로 채용한다. 

- 1951~1960년대

 포드 자동차 회사는 1955년 포드 선더버드 (Thunderbird)를 발표하고, 1958년에는 엣셀 (Edsel) 브랜드를 발표한다. 그러나 엣셀 브랜드는 27개월이 안 돼 실패하였다. 이것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포드 자동차는 1960년 포드 팔콘(Falcon)을 시장에 출시하여 성공한다. 

- 1961~1970년대

1964년 포드 머스탱(Mustang)을 발표하면서 다시 재기에 성공하였고, 이것을 바탕으로 1967년 자회사인 포드 유럽까지 설립한다. 이 때 리 아이아코카(Le Iacocca)가 포드 머스탱과 핀토(Pinto)의 개발을 주도하여 포드 자동차를 회생으로 이끈다. 그러나 핀토는 후방 충돌 시 연료통 폭발 문제로 큰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 이 사건은 자동차 개발 과정의 윤리적 문제를 부각 시켰다.

- 1971~1980년대

  1979년에 마쯔다 지분 25%를 인수하였다. 1980년 에스코트(Escort)를 발표하였다.

- 1981~1990

  1990년에 영국 고급차 브랜드인 재큐어(Jaguar)를 인수한다.

 - 1991~현재(2014년)

  1991년에 SUV인 익스플로러 (Explorer) 발표하여 엄청난 판매고를 올린다. 2000년 BMW에서 랜드로버 (Land Rover) 인수했으나 2008년 인도 타타 자동차에 재큐어와 함께 매각한다.


3) 포드 자동차 브랜드

포드 자동차 회사는 포드라는 브랜드 이외에 링컨 브랜드로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다. 1958년 포드는 에드셀이라는 브랜드를 발표했지만, 판매 부진으로 1960년에 에드셀 브랜드를 폐기했다. 1985년 머큐르 (Mercury)란 브랜드를 발표했으나 2010년에 폐기시킨다. 포드는 1989년에 영국의 애스턴 마틴, 재규어, 다임러 (메르세데스 벤츠의 모기업인 다임러 AG가 아닌 재규어 자동차의 사업부), 그리고 랜드로버를 사들였고, 스웨덴의 볼보 자동차도 인수했다. 또한 일본 마쓰다의 지분 33.4%를 확보하여 포드 산하의 회사로 만들었다. 마쓰다와 미국 미시간 주 플랫 록 (Flat Rock)에 오토 얼라이언스 인터내셔널(Auto Alliance International)이라는 조인트 벤처 공장을 설립한다. 오토 얼라이언스 인터내셔널의 부품 사업부는 이후 비스티온(Visteon)으로 분사한다.

애스턴 마틴, 볼보, 재규어, 랜드로버를 묶어서 PAG (Premier Automotive Group)라는 고급 자동차 브랜드 그룹으로 있었으나, 포드의 경영 악화로 2007년에 프로드라이브에게 애스턴 마틴을, 2008년에 인도 타타그룹에게 랜드로버와 재규어를 매각하였고, 2010년 8월 볼보를 중국의 지리자동차에 매각하였다.


4) 해외 공장 및 합작

포드는 캐나다, 멕시코, 영국, 독일, 브라질,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중국, 그리고 몇몇 국가에서 자동차 제조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포드는 러시아 자동차 제조 회사인 GAZ (Gorkovsky Avtomobilny Zavod)와 협력 관계에 있기도 하다.



1. GM 3) GM 경영의 성공과 실패

자동차 회사 2012.05.01 22:06 Posted by 자동차 전문 교육 자동차 역사가

1. GM 3) GM 경영의 성공과 실패

 

<1900~1930년대> 초기 자동차 시대, 무한한 가능성

1908년의 값싸고 품질 좋은 모델 T의 등장으로 자동차가 광범위하게 보급되자, 본격적인 자동차 산업의 성장이 있었다. 이 시기에 모델 T의 판매로 인하여 미국의 일반 노동자조차도 자동차를 보유하게 되었고, 사용 후 수명이 다하거나, 새로운 구매 욕구로 인하여 새로운 자동차를 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포드 자동차는 초기 모델 T의 성공에 도취되어 대중의 욕구 변화를 간과하여 GM에게 추월 당하여 영원한 2등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대중의 신차 수요를 파악한 GM1928년 포드를 추월하였는데, 슬론의 탁월한 기업경영과 자동차 마켓팅의 개념과 포드의 미숙함 때문이었다. 1920년대 중반에 기본적인 자동차에 대한 요구가 채워졌다. 이제 고객들은 조잡한 모델 T에서 좀더 나은 사양과 고급 모델을 찾게 되었다. 1920년 후반까지, 슬론과 구드슨은 GM 2가지 기본 제품개발을 도입하였다. 첫째 단계적 다양한 모델 제공과 둘째 년간 모델 변경이다. 후자는 2가지 목적을 가졌는데 하나는 잠재적인 고객을 유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기본과 외관을 돋보이게 하는 새로운 사양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현재 자동차 업계의 경영의 불문율이다. 그리고 이때 GM은 현대 기업의 기본이 되는 사업부를 채택하여 각 사업부는 독립성을 유지하되 각 사업부 책임은 각자가 지고, 중앙에서 적절하게 통제하는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피터 드러커가 GM에 컨설팅을 제공하였던 사례를 통하여 알 수가 있다.

 

<1930~1960년대> GM의 전성기

1930년대를 지나자 GM은 미국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구축하게 되었다. 미국에 이은 유럽의 모터라이제이션 붐, 1~2차 세계 대전 중의 전쟁 물자 공급, 1~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유럽의 자동차 시설 파괴로 인한 미국 자동차에 대한 대규모 수요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GM의 압도적인 경영전략과 세계화의 전략으로 인하여 GM의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비록 UAW와 충돌이 있었지만,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을 제패하여 물질적인 보상으로 노동자를 회유하여 파업을 막았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이것은 국내의 현대기아의 상황과 너무나 유사하다. 하지만 60년대가 되자 전쟁 후휴증을 극복하고 유럽의 VW과 일본 토요타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미국의 소형차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미국은 전후 최대의 호황기를 맞이하여 크고 화려한 드림카와 같은 대형 자동차에 집착하게 된다. 이것으로 인하여 GM 1970년대에 오일 쇼크를 맞이 하고도 마치 마약과도 같은 고수익의 대형 자동차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다.

 

<1970~1980년대> GM과 미국 자동차 업계의 위기의 심화

1973년에 중동 전쟁의 발발로 1차 오일 쇼크가 발생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석유 공급면에서의 문제라기보다 석유를 물값보다 싸게 사용하던 미국의 소비자들에게 특히 충격적인 사건이다. 미국의 각 주별로 배급제를 실시하였고, 주유하기 위하여 주유소 별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는 전쟁의 파괴가 특히 심각했던 유럽인들에게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이 후 중동 전쟁이 끝나고, 기름값이 안정되자 다시 미국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름을 흥청망청 사용하게 되었고, 자동차 업계 역시 일부 소형차를 개발하였으나 여전히 대형차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다. 1979년에 이란 혁명이 일어나 중동 정세가 불안해져 원유값이 치솟아 GM을 비롯한 미국 메이커는 GM의 소형 브랜드인 새턴을 도입하고, 일본 토요타와의 합작 공장을 캘리주니아주에 NUMMI 공장을 세웠으나 GM은 여전히 토요타 핵심 방식을 배우지 못하고 체질 개선에 실패한다.

 

<1990~2008> GM 파산의 길로 가다.

이제 소비자의 눈은 지구 환경 문제의 심각화로 인하여 저연비, 친환경 소형차를 선호한다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토요타는 가장 먼저 프리우스를 개발하여 하이브리드를 미국 시장에 도입하여 환경 자동차 메이커로서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GM도 강력한 성능의 EV1을 개발하여 소비자들에게 렌탈하였으나, 명확한 이유 없이 EV1을 시장에서 일방적으로 철수시켜 자동차 시장에서 친환경 메이커로서 이미지 구축의 기회를 놓쳤다. 결국 1980년대부터 어려워진 GM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하여 파산하게 된다. 이 후 GM은 미국 정부의 재정지원으로 되살아났으나, 더 이상 미국을 대표하는 강력한 기업의 이미지는 가지기가 어려울 것 같다.

1. GM 2)GM이 이룩한 신기술들

자동차 회사 2012.04.30 12:20 Posted by 자동차 전문 교육 자동차 역사가

1. GM 2)GM이 이룩한 신기술들

<1910~1920년대>

-1913 -Charles F. Kettering(1876~1958)은 기동 전동기를 1913년 캐딜락에 적용

-1920년대의 Delco가 생산한 GM 세탁기이다.

-1927 -프로 자동차 디자이너인 Harley J. Earl(1893~1969)이 디자인한 최초로 생산된 자동차인

최초의 1927 LaSalle이다. GM에서 자동차 업계 최초의 “art and color”부서를 설립하였다.

 

<1930~1940년대>

-1930년의 최초의 캐딜락은 세계 최초의 V16 엔진을 적용

-GM의 천재적인 개발자인 “Boss Kettering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오랜 기간 동안 기술 개발을 담당했는데. 그는 듀퐁의 급속 건조의 Duco nitrocellulose 페인트를 자동차 생산에 적용하여 생산 시간과 재고를  단축하고 더불어 고객에게 다양한 색깔의 자동차를 제공할 수 있었다.

-테라틸렌 납을 가솔린에 첨가하여  고출력과 고압축비 엔진을 만들었다.

-케터링의 지도 아래 GM은 자동차 산업 최초로 대규모의 주행 시험장을 1924년에 건설하였다.

-1934 : GM은 미국에 최초로 성공적인 디젤 엔진의 기차를 생산하였다. 이 기차는 GM Electro-Motive Division에서 제조하여, Burlington 루트에 투입되었다.

-1939: 최초로 디젤용 트럭을 출시하여 고속도로 운송 시대를 열게 되었다.

-1938 : GM은 최초의 “dream car”를 설계하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뷰익의 “Y-Job

-1940 : 올드모빌은 Hydra-Matic으로 최초의 완전한 자동 변속기를 적용하였다.(클러치가 없음)

-1948: GM은 최초의 전후 디자인을 선보였는데, 센세이션한 캐딜락 Sixty Special인데, 록히드의 P-38 전투기의 “tail fin”을 모방하였다.

 

<1950~1970년대>

-1953: 7 3일에 디트로이트에서는 41살의 남자에게 인공 심장을 대체하는 수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의료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1953년에 쉬보레는 화이버글라스 차체에 Corvette dream car”를 자동차 업계 최초로 생산

-1971년 탐 표면을 탐사한 아폴로 15호의 David R. Scott James B. Irvin이 타던 이동 시스템인 Lunar Rover로서 GM Delco Electronics 사업부가 개발하였다

-GM 1970년대에 자동차 배기 가스의 유해 물질을 줄이기 위하여 촉매 변환기(catalytic converter) 1975년부터 GM이 생산한 국내 자동차에 적용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 GM Computer Command Control(CCC) exhaust emission 인데 , 1981년 이후 GM 차종에 적용 되었다. CCC 시스템은 공기/연료 혼합비를 조절하고, Air Injection Recator pump output을 통제하여 촉매변환기가 최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 1980년대에서 생산을 현대화하고 효율적으로 하고자 GM은 대량으로 로봇을 생산 현장에 적용하였다이런 로봇 용접에 의한 “Flexible automation” 인데 새로운 제품, 공장, 제조와 조립 설비에 약 40 billion을 투자하여 생산성을 증대하고, 제품 품질을 개선하기 위하여 전례 없는 대규모의 투자를 단행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생산시스템 혁신에도 불구하고 품질과 수익 개선되지 않아 적자를 보게 되었다. 생산 및 개발 인력에 대한 진정한 혁신 없는 생산 시스템의 개선이 얼마나 무의미 한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 GM(General Motors) 1) 현대 기업의 모태, 영원한 자동차 제국의 탄생과 몰락과 부활

-1904~1920 : GM의 형성기

GM의 역사는 인수합병의 역사이다. 1904년 미국 미시간주 플린트시에서 마차 공장을 운영했던 윌리엄 듀런트는 쓰러져 가는 자동회사인 뷰인’(Buick)을 인수한다. 당시 뷰익의 연간 생산대수는 28대였다. 그러나 듀런트는 4년만에 뷰익을 연산 8,820대를 생산하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자동차 회사로 성장시킨다.

이 당시에 6,200대를 생산하던 미국 1위 자동차 업체인 포드를 앞선 것었다. 듀런트는 미시간주 주지사의 손자로 30대 초반에 이미 마차를 팔아 100만 장자가 된 인물이다.

듀란트는 1908년에 올즈 모빌’(Olds Mobile)를 인수하고, 뉴저지에 본사를 설립하고 회사 이름을 제너럴 모터스(GM)으로 바꾼다. 이것은 GM의 출발이다.

듀란트는 1908~1910년까지 모두 25개의 회사를 인수합니다. 대부분 부품업체였지만, 이중에는 고급차 메이커인 캐딜락(1902년에 헨리 릴랜드가 창업)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무리한 인수는 회사 경영에 심각한 지장을 주게 되었다. 1910년에 모기업인 뷰익이 판매 부진에 빠지게 되고, 자금압박을 받게 된다. 그래서 듀런트는 은행에서 융자를 받는 대신 경영권을 내 놓는다.

 이후 듀런트는 또다른 경주용 자동차 회사인 시보레’(Chevrolet)자동차 회사를 또 창업합니다. 그리고 시보레 자동차에서 생산한 시보레 490’, ‘베이드 그랜’, ‘모얄메일등 대중차들이 엄청난 성공을 구두면서 재기에 성공한다. 그는 시보레의 주식과 GM의 주식을 맞바꿔 1916년 다시 GM의 경영권을 되찾는다.

그러나 그의 투기적인 기질이 되살아나면서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16~1920년 사이 그는 14개의 회사를 또 인수하게 된다. 자신이 GM의 외곽에서 세운 시보레를 다시 인수하는 것을 포함하였다. 그러나 1920년 경제 공황과 함께 GM이 다시 자금난에 빠지면서, 그른 1920년 다시 GM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후 그는 듀란트 자동차회사를 설립하였지만 대공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1936년 결코 파산하게 된다.

-1920~1950 : GM의 성장과 황금기

듀란트의 뒤를 이어 대주주 피엘 듀폰이 사장을 맡았다가 이어 23년 전문경영인 알프레드 슬론이 사장으로 선출됩니다. 그는 57년까지 GM을 맡아 GM을 세계 1위 자동차회사로 만드는 1등 공신 역할을 합니다. 알프레드 슬론의 모든 계층에 맞는 자동차를 제공한다는 멀티 브랜드 전략으로 포드를 누르고 근 60년간 세계 최고,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로 성장한다.

슬론은 조직을 정비하고, ‘모델 T’ 이 후 미국 자동차 시장의 50%를 점유한 1위 기업 포드를 따라 잡기 시작한다. 1920 GM의 시장점율은 20%에도 못 미쳤지만, 37년에 42%로 올라 21%로 떨어진 포드를 누르게 된다.

슬론은 오늘날 자동차 산업의 경영 관행을 확립하였다. 포드가 효율성을 강조해 값싼 자동차를 대량 생산해 누구나 차를 갖게 만들자는데 초점을 둔데 반해, GM의 슬론은 자동차 소유자에 차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인간의 라이프 스타일에 깊게 파고든 자동차의 역할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에 따란 GM은 가격, 디자인, 성능 등 다양한 차종을 양산했고, 또 같은 차라도 매년 새 모델이 나오는 관행을 이때부터 수립하였다. “GM에서는 내가 원하는 어떤 차종 살 수 있다것이 GM의 주장이었다.

이 시기에 GM은 영국 복스홀(1925), 독일 오펠(1929), 호주 홀덴(1931) 등을 인수 또는 설립하고, 공산화 이전인 1928년에 중국 상하이에 ‘GM 차이나를 세우고, 일본에는 이미 1907년 오사카에 공장을 세워, 2차 대전 직전까지 일본 최대의 자동차 회사로 남았다. 또 중국에서 2차 대전 전까지 자동차를 생산해 왔습니다.

2차 대전에는 군용 트럭을 생산하고, 전후에 GM은 승용차 생산을 재개하였다. 50~60년대 캐딜락

엘도라도, 뷰익 르세이버, 시보레 코베어 등이 잇따라 히트를 기록하면서 절대 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뒷꽁무니가 마치 제트기 뒤쪽처럼 삐죽하게 치솟은 테일핀으로 유명한 캐딜락 엘도라도 59년에 생산하였다.

-1960~1980 : GM 위기의 구조화

50년대에 어느 정도 전쟁의 후휴증을 극복한 유럽 자동차 회사들이 60년대 들어 미국 시장 점유율을 늘리게 시작하였다. GM은 유럽의 소형차에 대응하여 소형차 생산에 들어 갔지만, 대형차 위주 생산에 치중했던 GM은 소형차에서는 유럽차에 비해 경쟁력이 없었다.

여기에 70년대에 유연생산 방식으로 무장한 일본 자동차 업체들의 값싸고 품질 좋은 일본 소형차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오일쇼코가 1973년에 일어나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GM은 올펠 카데트’, 이수즈(일본)와 새한자동차(한국)합작의 제미니’, GM의 시베트 등 소형차를 잇달아 시장에 내 놓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따른 여파로 1980 GM은 약 76천만 달러의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는 등 창립 이후 최대 위기를 맞게 된다.

- 1980~1992 : GM의 조정기

1980년 최고 경영자에 오른 로저 스미스는 구조조정에 들어갑니다. 미국 내 공장의 15%에 해당하는 20여 곳의 공장을 폐쇄하고, 종업원 1/4에 해당하는 16명을 해고한다. 그리고 1986년부터 2년 공장 11곳을 폐쇄하고, 3만 명의 종업원을 해고하는 2차 구조조정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89 42억 달러의 흑자를 기록하며 구조조정 10년 만에 회사 경영 개선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처럼 보였다. 로저 스미스가 실시한 GM의 구조조정에 대한 영화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Roger and me” 보면 알 수가 있다. 이 영화에서 로스 스미스가 실시한 무자비한 구조 조정으로 인하여 디트로이트 초토화 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이 영화로 인해 마이클 무어 감독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회사 직원들에 대한 무자비한 해고와 비용절감으로 인해 적자를 흑자로 만들었지만, 1983년의 43%였던 GM의 미국시장 점유율이 1990년에는 33%대로 떨어졌습니다. 이 후 시장 점유율은 유럽, 일본 및 한국차의 진출로 더 이상 회복하지 못했다.

대규모 해고의 여파로 자동차 제작과정에서 품질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은 소비자들의 GM에 대한 제품 불만족을 나타내게 되었고, 때마침 등장한 일본의 브랜드의 값싸고 품질 좋은 자동차를 더욱 선호하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이때 GM은 직원들을 해고하는 대신에 자동차 공자에 대한 최신의 설비를 대규모로 투자하였으나 자동차에 품질은 올라가지 않았다.

-1992~2001

1992년에 GM 유럽본부의 잭 스미스가 최고 경영자가 됭낟. 잭 스미스는 취임 뒤 자동차 생산과 관련 없는 사업을 모두 매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확보된 자금을 마켓팅에 집중 투자하였다.

또 미국 시장에서 벗어나 해외 시장을 적극 공략하게 된다. 또 제품개발에는 투자를 아까지 않아 첨단 모델을 잇따라 출시하는 새로운 GM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인력감축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대신 아웃소싱을 효과적으로 활용합니다. 이 과정에서 노조와의 마찰은 불가피하였다.

1990년 초반의 적자행진을 93년에 마감하게 된다. 92 26억 달러 적자에서 93 25억 달러 흑자, 95 69억 달러 흑자로 뒤돌렸다. 하지만 이런 경영 실적 개선은 숫자 놀음으로 인한 실적 개선으로 주로 직원해고, 브랜드 축소, 공장 폐쇄로 인하여 얻어졌다. 여전히 GM 90년대의 SUV 시대의 열풍으로 경제적인 자동차를 개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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